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페르트 도굴 사건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* 당시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묘에는 대략 석회가 1m 정도의 두께로 다져진 회곽이 있어 드릴을 동원해도 뚫기 어려웠다고 하며[* 현대에도 이장이나 발굴 시 이런 회곽이 있을 경우 굴삭기와 소위 '''뿌레카'''라 부르는 유압 브레이커를 동원한다. 당연하게도 삽질로는 이빨조차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.] [[풍수지리]]와 관련된 설화에서는 불을 붙이려고 하자 바람이 불어나와 불을 꺼 버려 결국 똥을 들이부었다고도 한다. 조선 시대 당시 관과 묏자리에 물이 차는 것은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입거해 관에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석회 자체를 두껍게 다져 회곽을 만들어 관을 안치한 후 다시 석회를 덮는 게 일반적이었다. 흔히 [[회곽묘]]나 회격묘라고 하는 묘소 조성장식이 이것이다. 간혹 발견되는 조선 시대 [[미라]]도 관곽에 바른 석회가 굳으면서 엄청난 열과 함께 수분을 흡수하고 물의 침투를 막아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. 오페르트는 편지에서 '뚫으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뚫을 수 있다'는 식으로 허세를 부렸으나, 애초에 그들은 처음 석회층에 도달했을 때 석회가 아니라 강철이 막고 있다고 착각했다.[* [[영어 위키백과]] 문서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. 마침 관련 설화에도 '명당 자리이니 누가 도굴할까봐 회곽 위에 쇳물까지 부어 굳히고…'라는 얘기가 있다.] 애초에 수군 제독을 참칭한 것만 봐도 허언증 기질이 있었던 듯. * 정작 [[풍수지리]]적 [[명당]]은 이 무덤에서 백여 보 위에 있으며 이 자리는 그다지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. 도굴 굴욕을 당하고 나라를 말아먹은 자손을 뒀으며 그 후사마저 쇠미해졌으니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았다. 흥선대원군이 남연군의 묘자리를 알아볼 때 지관이 "여기 명당이 두 군데 있는데 한 곳은 자손 가운데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이고, 다른 한 곳은 자손이 만 대에 걸쳐 재물복을 누릴 자리"라고 하자 흥선대원군은 주저없이 전자를 선택했다는 야사도 있다.[* 이 야사를 모티브로 제작된게 영화 [[명당(영화)|명당]]이다.] * 이후 [[흥선대원군]]도 명당자리에 몸을 눕히게 되었으나 1906년 일제에 의해 이장되었고 1966년에 한 번 더 이장했다. * [[북한]]에서는 이 사건을 미제의 만행으로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있다. 물주가 [[미국인]] 젠킨스니까(…). [[친일반민족행위자]] 출신 [[월북]] 화가이자 [[고구려]] 고분 벽화 재현의 대가 정현웅의 작품 중 "미제의 남연군묘 도굴"이라는 작품이 있다. >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려던 해적의 무리 >위대한 수령 '''[[김일성]]''' 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갈이 교시하시였습니다. >《미제국주의자들은 첫 침략기도에서부터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과 략탈만행을 끊임없이 감행하였으며 조선인민앞에 영원히 씻을수 없는 수많은 죄악들을 저질렸습니다.》 >미국침략자들은 [[제너럴 셔먼호 사건|《셔먼》호침입]]의 참패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을대신 더욱더 홍악한 침략책동에 매여달렸습니다. >놈들은 그때 나라의 실권을 잡고있던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유골을 토적질해냄 으로써 그것을 미끼로 하여 우리 나라에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려고 하였습니다. >옛날부티 조상을 잘 모시는 우리 조선사람의 아름다운 풍속까지도 제놈들의 더러운 침략목적실현에 써먹으려 한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너질하고 악독한 미제 날강도들만이 생각해낼수 있는것이였습니다. >미국침략자들은 이 더러운 침략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침략선 한척을 평안도와 황해도의 주변바다에 침입시켜 여리가지 강도적 만행 을 감행하게 하였습니다. 이것은 우리 인민들의 주의가 이곳에 쏠리도록 하자는것이였습니다. >이러한 틈을 타서 1868년 4월 젠킨스를 두목으로 하는 100여명의 유골도적단이 침략선 <챠이나>호를 타고 충청도 아산만에 기여들었습니다. >이어 유골도적단은 륙지로 기여올라 남연군묘지가 있는 덕산군 가동으로 향하였습니다. >놈들은 목적지로 가는 동안에도 길옆의 관청을 습격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습니다. >4월 18일 저녁때가 거의 되여서야 목적지에 도착한 강도무리들은 서둘리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하였습니다. >그리나 놈들의 이러한 흉악한 책동은 처음부티 우리 인민들의 강력한 반항에 부딪쳤습니다. >놈들의 침략만행을 목격한 가동인민들이 호미와 괭이를 들고 놈들에게로 달려가 견결히 항거하였습니다. >그리하여 무덤을 파헤치던 미국놈들은 날이 밝자 우리 인민들 의 징벌이 무서위 목적을 이루지 못한채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. >(…) * 이후 명문가의 조상묘를 파헤쳐서 조상 유골을 인질로 몸값(?)을 요구하는 유사 범죄 행위가 자주 일어났는데 이것까지 오페르트를 흉내낸 것이라고 평가하긴 힘들다. 조상묘 도굴을 통한 몸값 요구 자체는 아주 유서 깊은 범죄였기 때문이다. [[구한말]]에는 화적떼가 몰려들어 6대조 할아버지 유골을 훔쳐내 돈 내고 찾아가라고 산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는 목격담도 있다고 한다. 그런데 얌전히 관을 통째로 퍼가면 그나마 다행인데 관 뚜껑을 열고 [[부관참시|썩은 해골의 목만 베어 가서]] 찾아가라고 소리질러대는 후손 입장에선 어그로 팍팍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. *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'''자신의 모국인 [[프로이센 왕국|프로이센]] 언론으로부터'''[* 오페르트는 함부르크 자유시 출신이지만 1867년 함부르크가 주권을 포기하고 북독일 연방으로 편입되었기에 그의 국적은 프로이센 왕국이었다.] [[나라 망신]]이라고 큰 비난을 받았다. 게다가 오페르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전체를 향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[[유럽]] 전체에 [[반유대주의]]가 팽배했기 때문에 이런 비난이 더욱 극심했다. 아무리 [[제국주의]], [[인종주의]], [[사회진화론]]이 판치던 시절이더라도 '''남의 무덤 파는 짓은 선 넘은 행위'''였다.[* 설령 오페르트가 유대계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. 아무리 극동의 약소국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왕실 무덤을 건드린 이상 프로이센은 이 사건을 그냥 덮어 둘 수 없었다. 더구나 해군 제독 신분까지 사칭했기 때문에 이 혐의로 결국 처벌받았다.] * 공범인 페롱 신부는 병인박해 때 [[순교]]한 다블뤼 주교의 뒤를 이어 장상이 된 리델 주교의 명에 따라 조선에 오지 못하고 1870년에 인도 퐁디셰리 교구로 임지가 바뀌어 1903년에 선종할 때까지 머물렀다.([[http://www.cpbc.co.kr/CMS/newspaper/view_body.php?cid=659040&path=201611|출처]])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